Acerca de
'만들어진 풍경' , 김재유 작가론 _ 2020
고윤정 (독립비평가, 이미단체 대표)
서구 회화에서 풍경의 재현은 17세기에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초 독일에서는 풍경화가 매우 주요한 장르가 되어 19세기 독일 회화사는 독일 풍경화의 역사라고까지 서술된다. ‘과학과 미술의 혼인’으로까지 표현되는 독일 낭만주의 미술에서는 현실의 풍경을 재구성하고 덧입힌 과학적 시선들이 풍경화에 대한 회화적 방법론이 가시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초기에 풍경화는 역사화에 비해 시각적인 만족만을 위한 장르로 취급이 되었지만 오히려 아카데미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규칙을 실험하는 매체로 점차 거듭난다. 또한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과 연결된 유기체가 되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회화로써 작동하게 된다.
거대하고 황량한 풍경을 담아내는 김재유 작가는 2019년부터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하여 인근의 선감도를 중심으로 생태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선감도는 대부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간척사업과 사회방조제가 생기면서 어민들의 본래 생계인 굴이나 염전, 바지락과 관련한 어업은 점차 사라지고, 대하 양식장과 포도 농장으로 점점 마을의 생업이 바뀌고 있는 과정에 놓인 섬이다. 2020년 발표하는 김재유의 신작은 선감도가 개발되면서 버려진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그 속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흔적과 뒤엉킨 흙더미들을 대상으로 한 대작을 보여주고 있다.
김재유 작가의 기존 작업들이 여행이나 일상의 생활 중 만나는 풍경이었다면, 현재에는 인적이 드문 빈 공간에서 무엇인가가 파괴되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만약 풍경을 그저 보이는 대로 그린다면 사진과 다른 지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김재유는 흩날리는 붓으로 풍경에서 오는 감성을 재현하고, 황량한 돌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작가가 사유하고 있는 사회가 만들어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시선 안에 머무르면서 관찰하는 이와 관찰되는 것, 주체와 객체의 관계 속에 위치하게 된다. 김재유가 대상화하는 자연은 거칠고, 회색이며, 죽은 생명의 흔적이 남겨진 오늘날의 황폐한 환경을 고스란히 인식한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작가의 신체를 넘어서는 대작을 마주하면서 화면을 만들고, 색을 덧입히는 행위의 궤적을 화폭에 싣고 있다. 김재유가 붓을 들고 선감도를 그려내는 몸짓은 일종의 수행문이자 발화의 성격을 갖는다. 작가는 커다란 화폭과 함께 현존하며, 현실적으로 다루고 싶은 내용을 구성하여 시각적 발화를 실천한다.
2018년에 작업한 <Floating Noise>, <몽중풍경>등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필치는 풍경을 자각하는 방향이 어디론가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 방향으로 풍경이 흩어져 있어, 물감이 흩어지는 방향과 이동의 방향이 일치하는 것을 보인다. 그에 비하여 경기창작센터의 선감도를 중심으로 한 작업들은 개발의 흔적이 남아 있는 풍경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자연의 힘이 섞여서 나온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생태계를 보여준다. 깎인 산과 돌, 흙, 인공적인 부분들이 불분명한 형체로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길에서 만나는 살아 있는 토끼가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진다. 마치 인체를 해부하듯 선감도의 지표면을 관찰한 시선은 어쩌다 지나가는 토끼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염전까지 뻗어나간다. 여기에서 ‘자연’은 조화로운 삶이나 산들 바람이 부는 한적한 모습의 자연이 아니라 ‘방치된’ 자연으로 누군가의 힘이 가미된 자연이다.
거대한 화폭이 보여주는 산은 흙갈색이 뒤덮고 있는데, 화면의 크기 때문인지 매우 추상적인 형태를 띠면서 방치된 과정에서 얻어진 자연스러움을 실감하게 한다. 작가가 담아내는 염전에는 거의 사람의 흔적이 없고, 풀숲이 뒤덮인 장면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 아니라 헝클어져 있어 오랜기간 뒤엉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재유의 작품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단면이 화폭으로 옮겨진 것을 넘어 그 뒤로 펼쳐진 난개발의 흔적이 연상된다. 풀이 있고, 토끼가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잡초같은 생명력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이어지고 있는 시스템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부산물을 보고 있는 느낌인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거대한 석산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회화를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과정을 제공한다. 석산/흙산으로 보이는 작업은 버려진 자연에서 오는 막연한 공포함의 기운을 전달한다. 쓰러져 있는 나무, 인적이 드문 염전 등을 보고 있자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여겨진다. 아름다운 풍경의 모습이 아닌 ‘만들어진’ 풍경에서는 그동안 주인공이 아니었던 단색의 거대한 돌과 흙이 주체가 된다. 지질학적 특성에 가까운 모습은 사회적, 자연적 환경의 표피를 그대로 설명한다.
인간 중심주의의 사회가 되면서 지구 환경의 시스템이 붕괴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시대에 온 것은 누구나가 느끼는 사실이다. 지구에 대한 지배력이 확장되고, 자연과 지구를 통제가능한 것으로 여기면서 오는 오작동은 선감도 곳곳에 보인다. 인간이 시작해야 할 일은 인간이 끝맺음을 하여야 하는데, 선감도의 방치된 자연은 통제불가능한 영역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장면은 유화 드로잉으로, 어떤 장면은 150호 이상의 큰 유화 작업으로 진행되기도 하는데, 그 장면들에서 보이는 작은 생명체들은 미미한 존재들이어서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의 장면은 마치 화폭 뒤에 펼쳐져 있는 환경들도 마치 눈앞에 그대로 보이는 것처럼 연결성있게 연출된다.
본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미술사 속 풍경은 인간의 힘이 닿지 않은 압도하는 풍경의 모습이다. 산업화의 역량이 이제 막 시작 단계인 지점에서는 청명하게 맑은 날씨, 빛이 내리쬐는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장면, 인간의 삶과 자연의 모습에서 오는 유동적인 현장, 건물과 바위의 형태, 사물과 자연, 사물과 풍경이 맺는 관계를 포착한 것이 주로 화면에 재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화’의 영역에서는 유동적인 자연의 흐름이 포착되기 마련인데, 반대로 석산과 흙의 추상적인 형태가 기반이 된 김재유의 작업에서는 ‘멈춤’이 느껴진다.
작가는 산과 나무가 흩날리면 흩날리는 대로, 멈춰 있으면 멈춰 있는 대로 화면에 옮기는데, 이 과정에서 붓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풍경을 그려 놓고 지우기도 하고, 붓과 나이프로 긁어내기도 하는 과정은 작가가 보고 느끼는 현장을 불규칙성과 모호함에 기대어 표현한다. 그렇게 작업에 붓질이 덧입혀질수록 오히려 현장의 생생한 모습은 더욱 분명히 전달된다. 2019년도에 그린 이전의 작업은 풍경이 보여주는 흩어지는 느낌을 강조하여 추상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특정한 표면과 형태가 보이는 김재유의 작업을 보면서 풍경화는 감상의 차원이 아닌 새로운 역사적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더불어 세잔이 현재의 풍경에서 가장 근본에 가까운 형상을 발견하려고 했듯이 근원적인 풍경은 지속적으로 단순화된 형태를 담는 것이다.
작가가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와 연동되어 특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재유의 작업은 자연을 옮긴 듯 하면서도 오히려 쿠르베의 리얼리즘적인 측면과 연동되는 부분이 있다. 마치 사진가의 시선이 카메라 뒤에 있어 어떤 사건을 바라보느냐가 어떤 장면을 선택했느냐, 보고 있는 눈빛의 이면에 담겨진 그만의 관점이 결국 무엇이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김재유의 시선은 인간이 빚어낸 ‘사회적 풍경’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방치된 자연, 다듬어지지 않고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이 보여주는 광경은 인간의 힘과 관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가가 직접 관찰하면서 석산의 특성, 염전의 모습, 헝크러진 풀로 이루어진 풍경은 우리에게는 비생명적인 환경을 보여주면서 작품 안에서 순수하게 표현되는 여러 가지 사물의 생명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김재유 특유의 가치와 의무가 무엇인지 암시하는 과정이다.
서양에서도 근대화와 산업화에 따라 풍경화는 변화를 겪었다.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이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보다는 바위와 안개 등 새로운 주체로 부각하는 사물들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김재유가 보고 있는 풍경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점에서 고유의 환경이 반영되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에 환경운동으로 갯벌의 생태계에 관심을 두었던 어르신들이 주변에 있었다. 짧지 않은 거리를 삼보일배로 다니면서 억지로 변화하고 있는 간척지 사업에 경종을 울렸던 과거의 흔적이 어쩐지 지금의 선감도에 남아 있는 듯 하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과장된 화면 안에서의 구도는 무엇인가를 논하기 이전에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